올해 인천 영화 주간 초이스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은 우리가 떠나고 머물고 마주치며 체험하는 여행을 둘러싼 다양한 양상들을 포착한다. 공항과 항공기에서 벌어지는 사건들로 여행이 지연되기도 하고, 가볍게 떠난 여행을 통해 해묵은 관계를 회복하거나 오랜 상처를 치유하기도 하며, 좋은 사람을 만나서 뒤늦게 여행지의 매력에 푹 젖어드는 마법 같은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혹은 목숨을 걸고 혹독한 자연과 마주하는 모험에 기꺼이 뛰어들거나 여행 끝에 인생을 여행하듯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그리하여 각자의 짧거나 긴 여행 속에서 새로운 내일을 살아가기 위한 희망을 발견한다.
가족여행은 관성화된 가족 관계에서 벗어나 서로의 진심을 지긋이 응시하는 계기가 된다. 물론 장시간을 붙어 있어야만 하는 상황은 해묵은 갈등을 수면 위로 끄집어내기도 한다. 티격태격하다가도 여행의 난관을 함께 헤쳐나가거나 아름다운경치 속에 함께 있다 보면 금세 마음이 풀어지기 마련이다. 적어도 여기에서 소개하는 영화들은 그렇다.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다른 가족을 힘들게 하거나(〈미스 리틀 선샤인〉) 뒤늦게 가족을 만나 서먹하더라도(〈가족이 되는 완벽한 방법〉), 혹은 한참 후에야 가족의 아픔을 깨닫게 되더라도(〈애프터썬〉), 결국 여행의 끝에서 가족은 비로소 가족의 진짜 얼굴을 마주한다.
우리는 여행을 떠나 머무는 낯선 장소에서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곤 한다. 때로는 그 인연이 사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여기에 모아놓은 영화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부터 일본의 도쿄,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스페인의 바르셀로나까지 각 도시의 고유한 풍경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순간을 포착한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자신들이 머무는 공간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여행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여행을 풍요롭게 한다. 그러나 그 인연은 결국 시작된 곳에서 끝을 맞이할 운명이다. 영화는 쉬이 사랑의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 그 사랑은 각자의 일상 속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다만 여행의 들뜬 시간 안에서만 지속될 수 있다. 그리하여 덩그러니 남겨진 사랑은 낯선 장소 안을 맴돌며 또다시 자신을 스쳐 지나갈 인연을 기다린다.
어른들의 도움 없이 멀리 여행하기에는 아직 어린 아이들이 각자의 간절한 이유를 가지고서 힘을 합쳐 어딘가로 떠난다. 목적지가 어디든, 거리가 얼마나 멀든, 누구와 함께 가든 간에 부모의 허락 없이 떠난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이들에게는 용기가 필요한 도전이자 일탈이다. 비록 어른들의 시선에서 납득할 수 없고 별 의미가 없어 보여도 아이들이 함께 계획을 세우고 여행을 떠나는 일련의 과정은 그들에게 진지하다. 그만큼 여행의 첫걸음을 떼는 순간부터 마주하는 매 순간순간들이 그대로 성장의 자양분이 된다. 여기에 모아놓은 세 편의 영화들, 즉 〈스탠 바이 미〉, 〈아이들은 즐겁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여행의 의미를 세밀하게 포착한 수작들이다
누군가에게는 여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용기가 필요한 모험일 수 있다. 여자들끼리 떠난 여행은 남성의 훼방으로 엉망이 되기도 하고(〈델마와 루이스〉, 〈내가 누워있을 때〉),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종차별을 겪기도 하며(〈그린 북〉), 젠더 규범에 어긋난 외모는 주변의 경계 어린 시선을 견뎌야 한다(〈프리실라, 사막의 여왕〉). 또한 장애인은 돌봄이라는 명목으로 신체를 구속받으며 여행의 자유를 제한받기도 한다(〈피넛 버터 팔콘〉). 다행히도, 이들 곁에는 난관을 함께 헤쳐나갈 동반자들이 있다. 그리하여 그들이 목적지를 향해 가는 지난한 여정은 그대로 세상의 억압에 맞서는 연대와 저항의 몸짓으로 거듭난다.
대만의 차이밍량 감독은 2012년 〈무색〉부터 2024년 〈무소주〉까지 붉은 승복을 입은 승려가 극도로 느리게 걷는 모습을 롱테이크로 담아낸 ‘행자 연작’을 총 열 편 연출했다. 행자 연작은 서유기에 등장하는 삼장법사에게 영감을 받아 그가 불경 원본을 찾아 떠난 순례길을 느린 걸음으로 복원하고 있다. 승려 역을 맡은 배우 이강생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만의 타이베이에서 시작해서 홍콩, 말레이시아의 쿠칭, 프랑스의 마르세유와 파리, 미국의 워싱턴 D.C.까지 세계 각국의 도시를 맨발로 걸었고 또 여전히 걷고 있다. 이번 포커스Ⅱ 섹션에서는 행자 연작 중 최근에 제작된 〈모래〉, 〈곳〉, 〈무소주〉 등 세 편의 영화를 상영한다. 특히 〈모래〉의 경우 54분으로 단축 편집된 버전을 한국 최초로 공개한다. 참고로, 〈모래〉는 대만의 주앙웨이, 〈곳〉은 프랑스의 파리, 〈무소주〉는 미국의 워싱턴 D.C.를 배경으로 촬영했다.
승려는 매번 다른 여행지를 찾지만 주변의 풍경에는 관심이 없다. 굳이 행인들로 번잡한 도심 한가운데를 걷고, 아름다운 경치를 지닌 바닷가를 걷고, 볼거리로 가득한 박물관을 걷지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의 느린 발걸음에만 집중하기에 관광객의 걷기와는 분명 다르다. 또한 프레임의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걷는 데 걸리는 시간이 대략 5분이 넘을 만큼 매우 느리게 걷기에 이동의 실효성마저 부재한 걸음이다. 마치 걸음 그 자체를 부각시키기 위한 걷기이자 이동과 정지 사이에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 내고자 애쓰는 몸짓처럼 보인다. 아무리 전 세계를 돌아다녀도 그곳을 관찰하거나 체험하지 않고 오직 발끝만 응시하는 것은 익숙한 여행의 문법에서 이탈한다. 오히려 그것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 내 안으로의 끝없는 침잠에 가까워 보인다. 그럼에도 그것은 속세와 절연한 채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고행의 관습과도 다르다. 차이밍량은 여행과 고행 사이에서 걷기를 재발명하고 있다.
올해 인천 영화 열전에서는 인천의 변화를 다룬 다큐멘터리로서, 최근에 극장을 통해 관객들을 만난 작품들을 상영한다. 먼저 〈아주 오래된 미래 도시〉와 〈보는 것을 사랑한다〉는 인천항이 위치해 개항 도시로서의 특색이 진하게 남아 있는 중구를 탐색한다. 두 작품은 각각 ‘애관극장’과 ‘도시 재생’을 키워드로 하여 그곳의 가치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살펴본다. 그리고 〈열 개의 우물〉은 과거 동구와 부평구에 위치했던 달동네에서 빈민운동을 했던 여성들을 찾아가 당시를 회상하며 현재적 의미를 묻는다. 이 세 편의 다큐멘터리는 앞으로 인천이 그려나가야 할 미래의 모습에 대한 단서를 과거에서 찾는다.